1757년 정성왕후와 인원왕후가 한달새로 죽자 사도세자는 깊은 절망에 떨어집니다. 누나 화평옹주도 없는데 영조와의 사이를 중재할 사람이 모두 사라진 것입니다. 선희궁 영빈, 화완옹주, 혜경궁은 세자에게 큰 힘이 되지 못하고 사태를 관망하던 입장입니다. 영조는 양모 인원왕후에게 많은 은혜를 입어 계비 정순왕후도 경주 김씨 가문에서 간택합니다, 정통성이 약한 왕은 대비의 강력한 지원이 필요하고 아들이 없는 대비는 양자의 도움이 필요한 공생관계입니다. 이를 저버린 경우가 광해군이고 활용한 계기가 효종과 영조 입니다. 경종 독살설이 나왔을때 인원왕후도 게장과 감을 올린 주모자이고 인삼과 부자를 올린 이가 연잉군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일부러 독살을 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두사람이 경종의 수명을 단축시켰다는 주장이 가능합니다. 숙종은 인원왕후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영조가 숙종의 명릉에 합장합니다. 영빈 이씨도 인원왕후의 추천으로 후궁이 된 경우라 사도세자의 탄생에 지대한 공이 있습니다. 인원왕후의 궁녀 빙애가 사도의 후궁 경빈이 된것도 기막힌 우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