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 612년,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은 수나라 113만 대군을 맞아 ‘살수대첩’이라는 기적 같은 승리를 이끌었다. 무력은 물론 지략에서도 뛰어난 그는, ‘을지문덕 5언시’로 유인전술을 펼쳐 수나라의 군대가 고구려 국경 깊숙이 들어오도록 유도한 뒤, 퇴로를 차단하고 살수(청천강)에서 궤멸시켰다. 이 전투는 단순한 군사적 승리가 아니라, 고구려의 존속과 동북아시아의 균형을 지킨 역사적 분기점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승리 이후 을지문덕은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다. 『삼국사기』에도 이후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왜일까?
그 답은, 오히려 정치에 있었다.
당시 고구려의 국왕은 **영양왕(재위 590~618년)**이었다. 살수대첩은 그의 치세 중 가장 위대한 전과였지만, 실질적인 전략과 명성은 모두 을지문덕에게 집중됐다. 문제는 고구려 내부의 권력구조였다. 당시 고구려는 귀족연합 정치로, 국왕이 절대 권력을 행사하기 어려웠고, 군사·행정 실권은 지방 귀족 출신의 대신들에 의해 나뉘어 있었다. 을지문덕 또한 이러한 귀족 중 하나였으나, 그의 이름은 이제 왕권보다 더 크고 두려운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실제로 살수대첩 후, 민심은 "을지 장군이 나라를 구했다"는 소문과 함께 움직였다. 이는 왕실과 중앙 귀족들에게는 심각한 위협이었다. 전쟁 영웅은 언제든지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으며, 이는 반란이나 쿠데타의 싹으로 간주되기 쉬웠다. 역사적으로도, 고구려에서는 대대로 왕을 위협하는 강력한 무장이 숙청당하거나 유배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리하여, 살수대첩 직후 영양왕은 을지문덕의 전공을 크게 포장하지 않고 조용히 덮는 쪽을 택했다. 국왕은 그의 위업을 공적으로 칭송하기보다는 조정에서의 영향력을 줄이려 했고, 정치적으로는 을지문덕을 명예로운 은퇴로 유도하거나 외곽 지역으로 유배에 가까운 파견을 보냈다는 설이 유력하다. 기록에 사라졌다는 것은 그가 실제로 죽임을 당했기보다, 정치적 이유로 의도적으로 ‘역사에서 지워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 다른 정황은, 이후 영류왕(재위 618~642년) 시대에도 을지문덕이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여전히 당나라와의 충돌을 대비해야 했고, 전설적인 지휘관의 지혜가 절실했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단순한 자연사보다도, 정치적 배제로 인해 재등장하지 못했던 상황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고구려가 내부적으로 점점 왕권 약화와 귀족 간 대립으로 피폐해지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한 명의 ‘영웅’은 체제를 흔드는 도화선이 될 수 있었고, 그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정치적 침묵이라는 방식이 선택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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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을지문덕이 역사에서 사라진 것은 단지 그의 생애가 끝나서가 아니라, 정치권의 의도적 배제와 기록 통제의 결과일 수 있다. 고구려의 생존을 이끈 장수는 살아남았지만, 체제의 생존을 위해 사라져야 했다. 영웅이 위협이 될 때, 역사는 그를 침묵시킨다. 그것이 바로 을지문덕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반달곰 제외한 불곰 등 거대곰들은 오늘날로 치면 만주, 시베리아에서 주로 서식했고, 반면 호랑이와 표범은 한반도가 주서식지였음. 한반도가 산이 많고 산세가 험했기 때문에. 즉 만주를 기반으로 곰을 토템신앙으로 한 부족(맥족)과 한반도를 기반으로 범을 토템으로 한 부족(예족)이 있었고 환웅으로 대변되는 이주집단이 그 중 만주세력과 손을 잡고 고조선이 건국되었다고 봐야함. 고조선은 영토가 오늘날 요서와 요동, 서북한 지역인 것도 그런걸 잘 보여줌. 즉, 단군신화만 봐도 고조선 영토를 추정할 수 있음. 천손족이 이동해와서 불곰이 서식하던 지역까지가 고조선의 직접통치 지역이었고, 범이 많던 한반도는 간접지배형식이었을 것임. 한반도 지형은 산이 많아서 고대부터 지금까지 정복이 어려웠기 땜에 아마 한반도를 기반으로 한 예족은 고조선에서 간접통치 방식으로 영향력 내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음. 한반도가 우리 역사 주무대로 떠오른건 위만조선이 망한 이후임
한국인의 역사.
BC13,000년 충북 청주 소로리서 세계최초로 벼농사를 시작한 한국인은(세계최초의 신석기 농업혁명)
BC11,000년경 마지막 빙하기가 물러가고 만주,내몽골지역이 따듯해져 그 곳까지 주거지를 확장합니다.
(연해주 악마문동굴서 BC8,000년 한국인의 시신5구와 유적 발견(DNA검사결과))
BC3,100년경 만주,내몽골지역 요하유역 홍산지역서 고조선족(동이족)이 아시아최초로 청동기 문명 건설.{우하량곰토템유적)
BC2,700년경 청동무기와 기마부대를 앞세운 고조선족(동이족)이 중국대륙을 정복하고 중국에 동이족의 시대가 열림.
(북방민족에 의한 최초의 중국정복),
당시 고대문명단계에 들어갔던 고조선족은 인구가 약 10,000,000명.문명이전단계에 있던 석기시대의 충국토착족(화하족)의 인구는 약2,000,000으로 추정.
(당시 고조선족은 농업과 수리를 통해 고도의 토지생산력을 갖고 있었고 석기시대에 머무르던 중국토착족은 채집,수렵,원시적인 농업을 통해 볼 때 당시 토착인구는 기껏해야 2백만 정도입니다.)
당시 하은주 등 황하유역의 국가는 전부 동이족이며 화하족은 주로 양자강유역과 사천분지에 분포.
BC2,333년 동이족이 건조해진 내몽골 황산지역을 버리고 현 북경 조선하유역에 조선(고조선)을 건국함.
은나라 등 많은 제후국을 두고 봉건제를 통해 중국을 통치.
BC425년 고조선의 봉건제가 무너지고 수많은 동이족이 군웅할거하는 전쟁시대에 들어감(중국선 이를 전국시대라 함)
BC238년 고조선이 무너지고 부여,흉노,선비,오환,삼한으로 분열됨.
BC108년 부여 중원지역의 산동지방을 상실하고 원주지인 내몽골,만주지역서 북부여로 왕조교체,북부여,동부여로 분열.
춘추전국시대 화하족국가는 초,오,월이며 농경화된 동이족국가는 제,진,한,위,조,연 등이 있음.
한나라유방은 동이족이지만 토착족과의 협력을 우선시하면서 동이족의 정체성을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토안에 들어오는 모든 민족을 한족이라는 새로운 민족명으로 개칭하고 역사를 새출발하게 됩니다.
유방은 토착족을 적대하기보다 자신의 세력안으로 끌어들여 세력확장을 택하는 쪽으로 정책을 취함.
오늘날 중국인구는 7억명이 동이족혈통이고 나머지 7억명이 토착족인 화하족 출신으로 추정.
BC37년 북부여가 고구려로 왕조교체.
BC18년 동이족고토인 산동성에 백제건국.
AD669년 고구려 고당전쟁에서 패해 황하유역을 잃고 내몽골과 만주로 후퇴하여 고씨왕조몰락하고 대씨왕조로 왕조교체(발해,걸걸중상)
AD926년 발해의 장수이던 야율아버지(야율아보기)가 쿠데타를 일으켜 대씨왕조를 축출하고 왕조교체.
AD1115년 만주의 통일신라계 아골타가 쿠테타를 일으켜 금씨왕조(김씨왕조)를 세우고 만주와 황하유역을 차지함.요를 멸했으나 요의 영토였던 몽골고원과 중앙아시아를 상실함.
AD 1206년 몽골고원에서 대무신(테무친)이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며 모쿠리제국(몽골제국)을 선포함.
AD1270년 몽골제국과 고려가 혼인동맹으로 연합왕국이 됨.(고려왕은 몽골황제선출희의인 쿠리타이에 참가자격,)
AD1616년 만주서 여진족이 금씨왕조(김씨왕조)를 세우고 후금이라 칭함.중국정복.
AD1912년.청조의 몰락으로 중국의 동이족지배 시대 끝남.
동아시아서 동이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는 나라는 몽골과 한국이 유일한데.
중국에는 중국어를 쓰며 중국인처럼 살아가고 있는 동이족이 7억명이나 됩니다.(동이족=단군의 후손)
대한민국은 빨리 소련처럼 중국을 붕괴시키고 고토회복하여 동이족의 정체성을 찾아줘야 할 역사적 책임이 있습니다.
중국이 주장하는 중국역사는 다 가짜.그냥 개소리입니다.